종교와 과학의 균형점 찾기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은 리차드 도킨슨이라는 저자가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의 일신교를 비판한 내용이다.
책을 읽다보면 유일신 종교인들의 현대과학과의 비적합성을 비판하며 신에 의존한 창조론이 과학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나 유교와 같은 신을 섬기지 않는 종교는 철학이라고 여기고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진화론을 근거로 한 작가의 유신론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서 시원함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인간을 일원론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야에 그를 비판하고픈 답답함 역시 느꼈다. 그는 유신론자들을 정의 내리기를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신이 정해놓은 관념, 이른바 경전에 의지하며 스스로에 대한 주체적 권리를 내맡겨놓고 자율적으로 신에 구속된 사람이라는 그만의 판단을 이미 뿌리 깊이 내린 듯하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드물지만 있는데 말이다.
만들어진 신…….
지금의 종교 단체들의 행각을 보면 그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도올 김용옥의 종교론을 보면 하느님, ‘야훼’는 원래 헤브라이인들의 부족신이었단다. 이 토착신이 시간이 흐를수록 지구 인류를 창조한 권능을 가지게 되고 나중에는 우주의 질서를 잡는 절대신이 되고 최근 데이비드 호킨스의 ‘호모 스피리투스’를 읽어보면 이제 다시 그 신성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자아 안으로 돌아와 우리들 속에 내재된 절대적 주관이라는 성향으로 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진화함에 따라 일개 부족신이 만능 절대신에서 다시 자성으로 돌아가는 의미 변화 역시 덩달아 이루어지고 있다. 왠지 마지막의 변화는 불교적 의미가 짙다.
우선 나는 일단은 도킨슨과 같은 무신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 긍정하는 부분을 많이 느꼈다. 그가 과학자였기에 그의 논리가 정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긴 해도 내가 유신론자이긴 하지만 유일신론자는 아니고 신이라는 존재에 의지하고픈 사람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의 본성이 인간과 생물 여타의 존재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신이라고 해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지도 않는다. 다만 난 신의 존재를 부정만 하지 않는 유신론자일 뿐이다.
나는 그의 책 제목처럼 신의 존재 자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신의 의미나 말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모나 세상에 의해서 몸이나 정신이라는 껍데기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내 본래 본성은 영원불멸하여 만들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과학적 지식에 긍정을 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한 편으로 비판하고 싶은 내용도 발견한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신은 없다고 말하는 리차드 도킨슨의 주장은 터무니없고 이른 명제라고 생각한다.
여태껏 과학이 증명해 왔던 모든 법칙들은 그것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없던 것이라고 믿어왔었다. 과학자들이 지적 호기심으로 도전하여 새로운 지혜의 세계를 발견할 때 우리는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된다. 전에는 없었던 진리를 과학이 새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는 채 발굴하지 못했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가 지금 당장 증명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아예 없는 것이라고 가능성을 닫아버린다는 것은 여태까지 존재해온 과학의 근원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닐까?
과학자가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 사고를 한다는 것은 가능성 하나만 보고서 호기심으로 가지고 탐구해서 증명해온 과학도로서 너무나 닫혀있는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과학이 증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진실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리차드 도킨슨의 과학이 증명하지 못하면, 그건 없다는 사고방식이야 말로 일부 종교인들의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닫힌 마음의 구현처럼 보였다. 그것은 명백히 과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진화론이 옳다고 여겨지고 있다면 그것은 현재의 과학적 정의 안에서이다.
과학자라면 그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언제든 열어두어야 한다. 그것은 신을 믿던 그렇지 않던 간에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말이다.
나처럼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은 일신교에서 생각하는 신의 정의와는 거리가 먼 신들을 상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단지 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위상이 인간의 가치보다 높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가치는 신이든 인간이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을 읽을수록 리차드 도킨슨이 무신론을 내세우며 비판하고 싶은 것은 종교인 전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사회의 자정작용을 돕는 수행인들을 키우고 있는 종교의 순기능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킨슨이 꼬집고 싶었던 종교인은 종교의 배경, 신의 이름을 이용해서 비리를 저지르거나 권력을 행사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등 오히려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를 오염시키는 종교인들과 그 단체들인 것 같다.
바로 ‘종교 이념’이라는 사회정의를 부여해주는 신을 자신들의 왕관을 지키려는 명분의 방패로 이용하는 종교인들의 조악한 행동들을 보고 나니 그 꼴을 더 이상 못보고 있겠다는 과학자들이 그들의 행실을 비판하는 이념을 과학적 사실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가 이 책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무튼 이 책은 물리학, 신학, 철학, 등 광범위한 부분에 걸쳐 다양한 지식의 보고여서 읽는 내내 도움이 많이 되었고 현재의 종교와 과학의 부딪힘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기독교의 창조론과 과학계의 진화론 사이엔 아직도 많은 갈등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천주교는 교황의 진화론을 인정하는 발표 이래 신자 중 약 80%가 진화론을 인정하고 불교는 70%가 진화론을 인정하는데 비해 기독교는 38%만이 진화론을 인정한다는 통계가 있다.
게다가 기독교는 자체적으로 창조론을 창조과학, 지적설계론으로까지 발전시켜나가고 있고 과학 분야의 다윈에서 시작한 150년 역사의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어 이제까지의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과 연구 노력을 신성모독이라 폄하하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그에 맞서 진화론의 증거를 찾아 과학자로서의 순수한 지적 자존심과 긍지를 높이고 기독교의 창조론에 반박하여 설득하려고 하다 보니 서로의 영역 싸움처럼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보니 리차드 도킨슨이 진화론 쪽에서 아주 중점적인 역할을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견하건대, 과학계와 종교계의 이러한 다툼은 아주 오래 갈 것이다.
금강경 구절 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 是人行邪道(시인행사도)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
물질적으로 여래(부처)를 찾는 사람은 바르지 못한 길을 걷는 사람이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종교는 원칙적으로 눈에 안 보이는 비물질, 영의 발견과 수행을 중시하는데 비해 과학은 그것을 눈에 보이는 물질로 증명하고자 한다.
현재 그들은 신성의 유무와 시비를 주장하거나 증명하려고 하면서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말한다. 두 분야 간의 몰이해는 이렇게 근원적인 이해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신이 있든 없든 간에 종교는 있다.
믿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종교는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를 대답해주고 과학은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대답해준다고 한다.
의문사 하나 다를 뿐이지만 답변의 거리로 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도킨슨은 과학의 영역은 종교인이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인 듯이 말하고 있고 종교의 역할은 철학이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면도 있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면이 있기도 하다.
당장 천체 물리학의 새로운 학설을 접할 때면 불교의 사상을 자주 접하게 될 때가 많다. 불교 경전에서는 수천 년 전에 이미 다루었던 내용을 물리학계에서 이제야 새로운 학설이라며 발표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도 종교의 명함을 달지 않은 철학자들이 명함에 구속되는 종교인들보다는 어쩌면 더 순수하게 근원을 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쩐지 책 속 그의 논리는 너무나 과학자로서만 짚어본 원리원칙 같은 명제이다. 과학은 지식일 수는 있지만 지혜로울 순 없다. 대신 종교는 사람들에게 지혜로움과 위안을 제시한다.
때때로 종교인의 행동이 지식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어리석을 정도로 보인다면 그것은 또한 종교적 개념으로 볼 때 후세를 위한 역발상의 지혜를 제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종교는 지금 순간만을 증명하는 과학 같은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과학자들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시공에 갇힌 지식 안에서 시비를 가리는 습성이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
서로 추구하는 물음과 해법의 거리가 먼 두 분야가 현재 부딪힘을 느낀다면 그것은 각자 욕심의 잣대 때문이 아닐까. 과학이 종교화하려는 욕심이거나 종교가 지식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내었거나 말이다. 욕심이 눈을 가리면 뭐든지 맑게 보이는 법이 없다.
종교와 학문이 서로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함께 조화롭게 발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종교가 학문을 지배하면 학문에 종교색이 더해져 진리 탐구의 중립이 어렵고 학문이 종교화되면 탐구가 윤리를 놓치게 되어 아주 잔인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두 분야의 넘침과 치우침이 아니라 조절과 견제의 상생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이 두 분야가 평형을 유지하는 과정 속에 일어나는 일이 바로 부딪힘이기에 오히려 잦은 부딪힘들은 균형유지가 잘 이뤄지고 있다는 전주곡이라고 생각한다.
의식계이든 물질계이든지 진보를 하려면 항상 교정의 순간이 있어왔고 그 과정에서 기존세력과 신진세력의 갈등이 있어왔다. ‘더 좋은 것이 좋은 것의 적’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속담도 있다.
비물질이든 물질이든 업그레이드될수록 퇴물취급 받는 이전의 체계는 이후의 새로운 체계를 원수처럼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간의 잔인함이고 진보의 역사다. 이제까지 종교가 치러온 성전이 타종교에 대한 것이었다면 오늘 리차드 도킨슨의 책을 통해 신을 숭배하는 이들은 새로운 적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종교든 학문이든 항상 시간의 터널을 지나며 교정을 통한 진화를 하기에 나는 현재의 갈등에 대해 걱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둘이 서로를 견제하며 부딪칠 때 사상자 같은 많은 희생자들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독서 후기도 한국에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이 나오자마자 읽어보고 썼던 때라 꽤 오래 전에 썼던 글입니다.
그래서 엄청 문장이 길고 복잡해요.^^
지금 썼으면 좀 더 단순 명료한 문장으로 썼을 텐데.ㅋㅋ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읽고 (0) | 2022.04.04 |
---|---|
‘육식의 종말-제레미 리프킨’의 책을 읽고 (0) | 2022.04.03 |
독서를 하자 (0) | 2022.04.02 |
신영복의 ‘더불어 숲’을 읽고 (0) | 2022.04.02 |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혁명’을 읽고 (0) | 2022.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