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알 부처
부처가 뭐길래 그렇게 매달리느냐고 내게 묻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정작 그들의 말처럼 부처에 매달리며 집착하고 있지는 않다. 세상에서 부처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을 설파해주는 스승이 있다면, 그리고 그 종교가 내 가까이에 인연이 된다면 나는 언제라도 그 가르침을 듣기 위해 개종할 수 있는 배덕을 가진 사람이다.
부처가 뭐냐고 묻는 이에게 ‘부처는 너’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이해해줄까?
내게 부처를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는 이들은 대부분 부처와 중생 사이에 미리 경계를 짓고 있다. 부처가 뭐냐고 묻기 때문에 자신들이 모두 불성, 부처와 같은 성품을 가진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부처와 중생 사이에 경계가 지어질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시공에 얽매여 없는 경계를 분명히 짓고 사는 것이다. 그것만 봐도 다시금 우리의 습관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알 수 있다.
하지만 보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으로 밝힐 수 있는 "색" 을 통해서도 부처와 중생의 경계가 모호함을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먹는 한 알의 보리알은 내 몸밖에 있을 때는 나와는 다른 것, 즉 ‘타(他)’라는 개념이지만 내가 삼키면 이것은 내가 '먹는다'는 인연을 통해 내 몸이 되고 다른 내 몸의 세포와 마찬가지로 내 관리하의 내 몸, ‘나’가 된다. 남이었던 보리알이 어느 순간 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 몸에 집착하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이 몸이 정말 쓸모없어서, 헛되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과 내 몸의 본래 뿌리가 다르지 않음을 모르는 걸 경계하는 것이며 내 몸에만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자칫 중생들이 자신의 몸에만 집착하다가 그로 인해 행하게 되는 이기심의 독단을 막고자 하는 경계의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몸이 귀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언제 자신의 몸이 될지 모를 만상, 즉, 남들의 몸의 귀함에 대해서도 차별 없이 대할 수 있다면 그게 무심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몸으로 볼 때 우리는 이미 만물 속에서 서로 몸이 이어진 하나의 보리알 핏줄들이니까 말이다.
참선을 할 때 무심의 눈으로 바라보라고 하는 말을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렇다면 오온의 눈으로 봐도 나라는 경계가 만물의 경계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오온의 경계로도 중생이 부처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왜냐면 부처의 몸과 중생의 몸은 다르지 않다고 색의 경계로 설명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간단히 설명하자면 오온으로 보이는 만상을 중생이라고 정의하면 시공을 넘나들며 존재하는 불성이 만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그렇다면 중생과 부처는 색의 경계로 봐도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색'과 마찬가지로 '공'의 개념으로 봐도 중생과 부처는 다를 바가 없다.
‘색’을 ‘물질’이라고, ‘공’을 ‘비물질’이라고 가정하면 좀 더 쉬운 설명이 가능해진다. ‘색’을 감각으로 접촉되는 물질로 ‘공’을 감각으로 접촉할 수 없는 ‘마음’이라고 보면 중생의 성품과 부처의 성품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부처의 사상에 영향 받아 불자가 된 중생을 보면 부처와 중생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질 것이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중생의 생각이 아니었는데 부처의 가르침이 보리알 같은 인연이 되어 중생의 마음 중에 분자처럼 자리 잡아 중생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면 부처의 사상은 곧 중생에게 전해진 보리알 사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의 일부 마음이 옮겨와 다른 마음에 담겨와 있으면 그 마음은 이어졌는가, 끊어졌는가?
대답할 것도 없이 보리알처럼 부처와 중생 역시 만상과 나 사이와 마찬가지로 서로 이어진 보리알 형제 사이인 것이다.
이처럼 색의 경계에서도 중생은 부처이고 부처는 중생이다.
단절된 시공의 벽에 갇혀 살던 오래된 습관 탓에 원래 쭈욱 이어져온 그 맑은 마음의 고리를 우리가 보려하지 않았을 뿐 색의 세계에서도 공의 세계에서도 우리 모두가 부처인 것이다.
때때로 수도자들 중에서 선하고 맑은 것들만이 부처를 이루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탁하고 악한 것들에 대해 스스로 장벽을 세우곤 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처는 패악을 저지른 사람을 봐도 비폭력과 평화의 가치를 중생에게 일깨우는 방편으로 삼고 선행을 봐도 그 이면의 은근한 악심을 짚어내어 경계한다. 부처님은 악행도 교과서로 삼고, 선행도 집착하지 않는다
부처를 통해 무심의 깨달음은 선악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불의에 눈감고 온갖 악행을 찬탄하라는 뜻은 아니다.
정도를 알려주며 따끔하게 죽비를 내려줄 줄 아는 맑은 가르침도 필요하지만 악인도 도법으로 이끌 줄 아는 걸림 없는 수도자가 되라는 말이다.
적어도 부처와 하나로 통하는 이 마음을 닦는 수행자라면 우리 종교만 믿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속 좁은 사람들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누가 뭐라 해도 이 세상의 남의 산 생명을 뜯어먹고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는 죄질만큼 끔찍하고 잔혹한 업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생존 죄인들임에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뭐.’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악업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여타의 악인들을 쓰다듬지 못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수행자로서는 품이 좁은 행동이 아닐까 한다.
여태까지 색과 공을 구분하여 부처를 설명하였지만 색과 공 역시 서로 다르지 않다. 우리들은 먹고 싸는 물질적 생활을 통해 비물질적 성품을 성숙시키기도 하니까 말이다. 물론 부처도 그러하고 중생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보리알을 먹는 이 과정 중에도 나의 영혼은 성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 알의 보리알이 키우는 것이 어디 나의 몸뿐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한 알의 보리알 속에 깃든 불성이 어디, 나라는 이 몸의 물질에만 연결되어 있겠는가?
여기 있는 이 한 알의 보리알이 이 몸과 동시에 이 불심과 연동함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 세상은 이미 불세계가 아닐까?
색의 경계를 사는 사람들은 공의 경계를 갈구하곤 한다.
참선은 공과 색이 합장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참선 때 사람들은 환희를 느끼곤 한다.
하긴 공과 색은 원래 하나였다가 견우와 직녀처럼 참선 때만 만나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황홀한 순간이겠는가? 서로 반쪽이 되어 외롭게 살고 있는 이 몸과 영혼의 적절한 합일을 주선하는 중매도 선행 축에 들까? 선지식들이 있는 이유는 이런 환희가 우리 일상과 그다지 별다를 게 없는 경계임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오늘 비벼먹는 양념장에 보리밥이 참 구수하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보리알 부처"는 2011년에 쓴 기도 후기 중의 하나이다.
이제 내가 불교에 심취했었던 시절을 정리할 겸 그 당시 써 놨던 참선 후기라던가 기도 후기를 올리려 한다.
1~2년 전만 해도 나는 내가 개불자라는 걸 잘 밝히지 않았다.
내 스스로 내가 불교 재가 수행자라고 말하기엔 많이 모자라다고 여겼기 때문에 정체성을 밝히기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고 본다.
타인의 평가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우수하거나 모범적인 수행자가 아니라고 해도 난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래서 그 때 써 놨던 기록들도 스스럼 없이 공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구니 같은 치과 의사가 약사여래의 현신 (0) | 2022.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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